어릴 적 살던 동네 안암동.
지금도 이곳에 자주 가는 편이다.
불알친구가 여전히 안암동에 살고 있고,
내가 주로 활동하는 지역과도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암동에 갈 때마다 아쉬운 마음이 앞선다.
예전, 내 머릿속 그곳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땅만 그대로이고, 거기에 있던 집과 건물은 완전히 바뀌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얼마 전 중국에 있다가 잠시 들어온 동네 친구도 못 알아보겠다며 혀를 내둘렀었다.
심지어 지금도 한 두 달이 지날 때마다 새 건물이 올라올 정도니까.
이른바 재개발, 재건축.
그 바람은, 역시 내가 자주 들르는 곳 중 하나인 녹번역에도 불어 닥쳤다.
어마어마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오는데,
그 때문에 녹번역은 지도가 바뀔 정도의 대변혁을 맞이하고 있다.
(이리도 많은 아파트를 올리는데 집 없는 사람이 절반이 넘는 현실, 정말이지 정상이 아니다.)
타워크레인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공사차량이 들락날락 거리는 건 나와 큰 상관이 없으나
아쉬운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재개발의 여파로 녹번역 바로 옆에 있는 명소, ‘김밥집’이 문을 닫게 된 것이다.
‘잔치잔치’, ‘착한 맛집’ 등등의 간판은 붙어있으나,
무엇이 진짜 가게 이름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곳을 알게 된 건 굉장히 오래전 일이다.
녹번역은 내가 제일 자주 이용하는 지하철역이어서,
역 바로 옆에 있는 김밥집에 출출함을 달래고자 들어갔었다.
가게 크기는 두 평 정도로 굉장히 작았다.
사장님과 사모님, 두 분이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가게 안쪽 모퉁이에는 시추 한 마리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친절하고 웃는 낯의 사모님과는 달리
사장님은 굉장히 무뚝뚝하고 약간 화난 표정이어서(특히 눈썹 부분이)
좋은 인상을 받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 곳의 김밥을 입에 넣은 순간, 깜짝 놀랐다.
김밥 한 줄에 1000원, 겉보기에는 ‘김밥 천국’류의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으나
무슨 비결일까, 깔끔한 첫 맛과 맛깔나는 뒷맛은
나를 방앗간 앞을 지나는 참새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 나만 그 매력에 반한 것이 아니었나 보다.
이 곳을 찾는 단골이 상당히 많아서
오전 11시가 넘어 찾아가면 김밥은 이미 동이 나 있었다.
몇 년 전부터 김밥이 1500원으로 올랐지만
이 곳을 찾는 손님은 줄지 않았고,
주 메뉴인 김밥 외에 김치, 참치 주먹밥, 샌드위치 등의 인기도 상당했다.
이 김밥집의 사장님, 사모님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건 4, 5년 전으로 기억한다.
가게에서 키우는 시추의 이름은 ‘똘이’였는데
어느 날 나는 사장님께 내가 그린 시추 그림을 건넸다.
“강아지를 좋아하시는 거 같아서, 이거 제가 그린 그림인데 선물로 드리려고요.”
사모님이 더 좋아하실 거 같았는데 예상은 정확히 빗나갔다.
그림을 받아든 사장님은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활짝 웃으셨다.
처음 보았다. 사장님의 웃는 얼굴을.
이 인연 이후,
김밥집을 찾아가면 사장님은 뭔가를 하나씩 더 챙겨주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김밥, 어떤 날은 주먹밥, 어떤 날은 샌드위치
사모님 눈치까지 봐가며 챙겨주시는 통에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였지만
참 감사했다. 첫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이후 그림을 크게 인쇄해 액자도 갖다 드리고,
새 그림이 완성되면 하나씩 챙겨드렸다.
그림을 받을 때마다 너무 좋아하셔서
내 마음도 덩달아 따뜻해졌다.
그리고 2018년,
앞서 적은 것처럼 재개발의 그림자가 녹번역에 드리웠다.
나는 좀 걱정이 되어 사장님께 여쭸다, 어떻게 하실 계획이냐고.
“글쎄, 아직 잘 모르겠어. 생각 중이에요, 어떻게 할지..”
사장님의 표정은 어두웠다.
김밥집의 문 닫는 시간은 평소보다 눈에 띄게 빨라졌다.
2018년 2월 26일 아침.
김밥집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일반 김밥 두 개를 주문한 나에게 사장님은 참치 김밥을 얹어주셨다.
“마침 잘 왔네..가게 오늘까지만 하고 정리하려고..”
“예?”
정말 아쉬웠다. 나는 사장님께 이렇게 맛있는 김밥인데, 다른 곳에서 장사를 하시면 어떻겠냐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사장님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장사를 한 게 23년이 되었어. 사업을 몇 번 크게 실패하고, 그래서 시작했는데. 그동안 아내가 한 번도 쉬지를 못했어요. 아내한테 미안해서, 이제 그만 해야겠어.”
나는 사장님께 다른 곳에서 혹시 새로 시작하시게 되면 꼭 연락을 달라고 말씀드렸고,
사장님은 내 전화번호를 달력에 꾹꾹 눌러 적었다.
김밥집을 나서고, 몇 걸음 떨어져 카메라를 꺼냈다.
이미 빨간 스프레이로 X표시가 그려진 옆 가게의 셔터가 을씨년스러웠다.
이곳이 재개발 되지 않았다면, 이 김밥집이 이렇게 허무하게 없어졌을까.
모든 재개발이 나쁘다 할 수는 없겠지만 아쉬운 마음은 금할 수 없다.
이제 얼마 후,
이곳에 어떤 건물이, 어떻게 세워질까.
하지만 이 곳을 스칠 때마다 김밥집이 떠오를 거 같다.
어느 곳보다 맛있는 김밥과, 그림을 받아든 사장님의 환한 미소와,
가게 한 구석을 지키던 똘이의 모습이
여전히 아른 거릴 거 같다.
2018년 2월 26일,
녹번역에 있는
최고의 김밥집을 보낸다.
http://blog.ohmynews.com/overkwon/553960
[오버권_사진 이야기] 최고의 김밥집을 보내며_2018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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