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쯤 일이다.
작업을 의뢰받았는데, 그동안 별로 그릴 일이 없었던 과거 배경의 일러스트였다.
상투에 갓에, 기와집과 초가집, 익숙하지 않기에 뭐 하나 쉬운 것이 없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곤란했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병풍’이었다. ‘병풍 그리는 게 뭐가 어렵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병풍에 들어가는 그림이다. 병풍에는 칸마다 그림이 붙어있다. 그것도 배경이 과거이니 주로 수묵화가. 현실감을 위해선 그림이 필요했지만, 일일이 수묵화를 새로 그려 넣을 수는 없는 노릇. 할 수 없이 저작권이 없는 수묵화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탕. 검색은 나름 자신 있다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고민을 안고 친구 집에서 술을 한 잔 했다. 그러다 족히 수 백 번은 봤었던 친구 집 식탁이 눈에 들어왔다. 식탁 위에 덮인 유리 밑에 수묵화 2장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그림이 뭐냐고 친구에게 물으니, 어머니께서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이런 그림이 어머니 방에 잔뜩 있다고. 친구의 어머니는 동네 주민 센터에서 수묵화를 배우셨는데 그간 그리셨던 걸 모아놓은 것이었다.
놀란 것은 작품의 수준이었는데, 작가의 것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훌륭했다. 센터에 꾸준히 다니시면서 이렇게 그려내시다니,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의 동의를 얻어 그림을 사용했다. 병풍 그림은 그렇게 해결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꾸준함과 노력의 위력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최근 페친 조미화님께 그림을 선물 받았다.
페이스북에서 직접 그린 그림을 올리신 건 봤지만, 인쇄본으로 보니 느낌이 또 달랐다.
조미화님의 그림에는 양림동 뒷동산에서 경험했던 유년 시절이 담겨있다. 어린 시절 친하게 지냈던 이웃인 양림동 선교회 고허번 원장님 가족과의 기억, 길에서 만난 수선화, 타잔처럼 칡넝쿨을 타다가 끊어졌던 일, 풀을 베시던 아버지의 모습, 호두나무에 매달려있던 외줄 그네까지. 조미화님은 컴퓨터 화면이라는 캔버스에 전용 펜을 이용해서 과거의 소중한 기억을 마치 일기장처럼 꾹꾹 눌러 담았다.
그림은 투박하지만 세부 표현은 정교했고, 색깔은 화려하지만 기억을 담아 따뜻했다. 자신의 기억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담아, 그림을 늘어놓으니 마치 이어져있는 필름처럼 느껴졌다.
일상 속에서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는 그림을 이토록 많이, 또한 꾸준히 그렸다는 것이 정말이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지런하신 분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 번 고개가 숙여졌다.
기억은 완전하지 않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그 모습이 희미해지고는 한다. 글로 그 기억을 남기는 것도 좋겠지만, 그림이라는 ‘창’이 있다면 누구든 그 기억에 좀 더 빠르고 친숙하게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자신만의 시간과 치유가 공존하는 그림을 통해, 조미화님의 마음은 물론, 그 시절을 기억하는 다른 분들의 마음까지 따뜻해졌을 것 같다.
기억한다는 것, 그린다는 것, 특히 꾸준히 한다는 것,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그것. 조미화님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고,
다른 분의 작품을 평가할 자격은 안 되지만, 그 따뜻한 기억의 그림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기억한다는 것, 그린다는 것, 조미화님의 그림_2020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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